2018년 9월 17일 월요일

내가 아는 아이의 정의에 따르면
나는 아줌마이자 아줌마가 아니다.
나는 결혼했기에 아줌마이지만
애가 없기에 아줌마가 아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혼란스러워했지만,
나는 하나도 걱정이 되지 않았고,
다만 아이가 자책을 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자책은 혼란스러움에서 많이 생긴다고나 할까?
이것이 나 때문인지, 나 때문이 아닌지, 남때문인지를 헷갈릴때 온다고 하겠다.

여기서 나와 非나, 남을 구별하여 쓴것도 이유가 있다.

예를 들면, 엄마와 경비아저씨가 내가 한 짓을 두고 싸우고 있는데,
그것이 나 때문에 싸우는 건지,
엄마가 그냥 경비아저씨한테 화를 내는 건지,
경비아저씨가 그냥 엄마한테 화를 내는 건지,
아이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때 엄마가 이건 니탓이 아니야 라고 말해주면 우선 1단계 완료,
그리고 경비아저씨가 이건 니탓이 아니야 라고 말해주면 우선 2단계 완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스스로 이건 내 탓이 아니라고 이해하면 최종 3단계 완료.
좌책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済んだ。

허나 이 경우들이 모두 불분명하여
행여나 이 모든 것이, 또는 어느 부분이 내 탓이었다는 생각이 들게되면,
거기서부터가 힘들어지는 과정이다.

자연재해가 내 탓이 아닌거는 학교에서 배웠다.
호텔이 문을 닫는 것은 내 탓이 아니다.
바다가 출렁이는 것도 내 탓이 아니다.
지진이 난 것도 내탓이 아니다.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내탓일수도 있다. 아주 쬐끔.
산호세에 지진이 나서 집이 무너져서 내가 홈리스가 되면,
지진보험을 들어놓지 않는 내탓이 된다. 아님 말고.

암튼 아님 말고의 자세가 매우 중요한데,
아님 말고의 자세에 까지 도달하기가
극히 어려운 것이다.

특히 나이가 어리거나
나이가 많아도 학교를 안가거나 못가거나
학원을 안가거나 못가거나
유투브를 많이 보지 않거나
영화나 책을 많이 보지 않거나
무한도전이나 나혼자산다나 전참시나 밥블레스유를 많이 보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기가 쉽다.
그니깐 좀 봐라. 뭐든. 그리고 경험하라. 뭐든.

니가 견뎌낼수 있는 한도까지.
포기하지말고 해봐라.
힘이들면 그때 그만두어도 된다.

나에게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으니깐.
난 친구가 많으니까.
그리고 민주주의는 나의 베프이며,
자본주의는 곧 나의 친구가 될지도 모르니까.
(너를 점점 더 알아가겠다 친구야)

그들이 나를 배신하지 않는한,
나도 그들을 배신하지 않겠다.

義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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