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30일 목요일

식욕

사실 나는 식욕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항상 배가 아파서 뭔가를 많이 먹으면 안될것 같았고
꼭 뭔가를 많이 먹으면 탈이났다.
한국에 가면 식욕이 엄청 생기는데
너무 맵다보니 아침마다 자꾸 배가 아팠다.

아빠는 "왜 너는 아침마다 배를 아파하냐, 미련하게 많이 먹어가지고"
라고 나에게 말하였는데
나는 너무 상처를 받았다.
미련한게 아니라 그냥 내 장이 안 좋은건데 흥칫뿡

암튼 아빠는 내가 자꾸 배를 아파하니까 걱정을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뭔가 아빠를 자꾸만 오해하고 있었다.
아빠랑 나는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에 문제가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점점 커뮤니케이션을 많이 하면 할수록 고쳐진다. 그래서 싸우고나서도 말을 해서 푸는게 중요한듯 -

호노포노포노 - 이것은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할때 주례를 서준 하와이안 목사님이 나에게 알려준 중요한 가치이다.
그분이 가르쳐준 가치가 세가지가 있다.
1. 알로하
2. 오하나
3. 호노포노포노

알로하는 안녕이라는 뜻도 있지만 잘가 라는 뜻도 있고 사랑이라는 뜻도 있다.
오하나는 가족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세번째가 진짜 대박인데, 호노포노포노란 싸우고 나서도 꼭 화해하는 것이다.
아 나는 이 가치를 마일스와 되새기며 얼마나 많은 날을 싸우고 화해했던가.

그래서 그 목사님한테 너무 감사드리는데,
이번에 하와이가서도 교회에 찾아가질 못했다.
항상 스노켈링이나 쇼핑을 하러다니느라고 인사도 못드리고 참 죄송스럽다.
사실 이름도 기억이 안난다......언젠가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싶다!

참고로 그 교회는 마일스의 great great mother의 할아버지인가 아버지가 세운 교회여서 의미가 깊었다. 교회에 그 할아버지와 사모님(할머니) 의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사진을 찍어오지 않았던것이 후회된다. 아 다음엔 꼭 가야지.


아 결론은 식욕이 없다는 건데,
미국에 와서 많이 좋아졌다.
미국음식이 식욕에 좋다 ㅋㅋㅋ
맵지도 않고 기름지고 베이컨을 먹다보면 에그베네딕트가 먹고싶고
그러다보면 햄버거랑 프렌치후라이가 먹고싶고
그러다보면 피자랑 샌드위치가 먹고싶고
뭐 그러다가 짜장면이랑 육개장이 그리워 꼭 한인타운에 일주일에 한번은 갔지만
어쨌든 미국에서는 배가 덜 아팠던 것 같다.
아마도 매운음식을 덜 먹어서 그런것인듯.
하지만 꼭 피해야할 음식이 있다면 우유도 아니고, 생선회도 아니고, 고기도 아니고, 야채도 아닌 생마늘.
삼겹살과 생마늘을 같이 먹으면 언제나 100% 탈이 난다.
한인타운은 우리집에서 차로 30분이나 걸리기 때문에
탈이나면 나는 죽는 기분이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ㅋㅋㅋㅋ


암튼 그래서 살이 쪘다! 야호! 이제 나도 더이상 말라깽이가 아니야.
내가 너무 살이 쪘나 라고 마일스에게 물어보면
미국사람치고는 마른편이라며 괜찮다고 해준다.
아 역시 우리 남편님 너무 관대하셔.ㅋㅋㅋ





폭풍 업데이트

가끔 폭풍 업데이트를 하는 이유는
너무 귀찮아서이다.
오탈자를 고치지 않는것도 따옴표를 쓰지 않는것도
핸드폰으로 쓰다보니 너무 귀찮아서이다.

아 이 귀차니스트 병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는다.
예전에 내 친구가 너는 귀찮다라고 말만 하는것만 빼고 다 좋은데 라고 이야기한적이 있었다.
(희정아, 너야 ㅋㅋㅋ)

그래서 아 내가 정말 귀차니스트구나 라는 자각이 생김.

한편 같은 학교의 남자반에 어떤 아이도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
선배형들이 군기를 잡으려고 니들 다 운동장으로 나와!
라고 했는데 한 아이만 아 귀찮아 라면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아이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회창아, 너야 ㅋㅋㅋ)

암튼 다리골절과 수술이 있은후로
너무 아프기도 했고, 도저히 움직일수가 없어서,
그래서 어쩔수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게 주로 나에대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나봐.

그래서 컴퓨터 또는 핸드폰에 가끔씩 내 옛날 이야기, 내 어릴적 재밌었던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는데,
왠지 블로그에 공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싸이월드처럼 나도 사람들과 다시 연결되고 싶다.
지금 비록 미국에 있어서 모두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내가 그들을 얼마나 좋아했고 존경했으며
또한 학창시절 얼마나 즐거웠었는지를 회상하니
갑자기 어린시절처럼 마음이 들뜨고 즐거웠다.

오랜만에 귀차니스트에서 밝은 소희어린이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요새 자꾸 쓴다. 블로그.
나도 밝은 소희어린이가 되고 싶은가봐.



패시브 인컴

사실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순수하지 않다 ㅋㅋㅋ 나에겐 얼터리어 모티브가 있었다.(순수하지 않은 의도라는 뜻인듯)

그것은 패시브인컴이라는 단어에서 시작된다.
어느날 내 예전 동료이자 친구가 된 아이가 패시브인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솔깃했다.

패시브인컴이란 적극적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아도 돈이 생기는 것 같은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자기가 좋아하는 메이크업정보를 유투브에 올리면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구독을 한다. 내가 먹방 유투버 벤쯔를 좋아하는 것처럼.(그의 유투브비디오를 보고 있으면 갑자기 없던 식욕이 생긴다)

아무튼 최근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도 돈을 버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아 ㅈㄹ 부러웠다.(욕주의)

나는 뭘 할수있을까.
나는 아마도 정치에 관심이 많으니까,
내 백그라운드도 그렇고 평소에 김어준팟캐나 이이제이팟캐같은거를 많이 듣고
또 오유를 내집드나들듯이 드나들었으며
트위터를 항상 스토킹하였기 때문에
아 나도 정치적인 목적의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생각보다 할말이 없더라.
아니 할말이 많아도 뭔가 내가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던가
지식이 딸린다던가 공부를 더 해야한다던가 뭐 그런 자신감이 없었다.

암튼 그러다보니 내 자서전같은 블로그가 된 것 같다.
나에 대해서 쓰는 건 자료조사가 필요없으니까.
출처를 달 필요도 없고.
그러다보니 패밀리 히스토리가 궁금하게 되었고
또 그러다보니 남의 가족의 히스토리가 엄청 궁금해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자꾸 캐묻게 되었다.(주로 마일스네 가족 ㅎㅎㅎ)

사실 마일스네 집(보스턴 옆 콩코드)에는 사년전에 가본이후로 가지 않았다.
항상 마일스네 부모님이 우리집에 놀러오셨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비행기값이 생기면 나는 자꾸 하와이에 가고싶었다.
보스턴은 춥고 더운데, 하와이는 가깝고 화창하고 바람도 좋고 바다도 상쾌하고 아무튼 기분이 좋았다.
나는 이럴때도 나의 효율을 생각하는구나.
시부모님이 이걸 아시면 얼마나 서운해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좀 들었다.

그래서 이번 땡쓰기빙이나 크리스마스에는 한번 가야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겐 또 얼터리어 모티브가 있다. ㅋㅋㅋ
가서 마일스 외할아버지에게 패밀리 히스토리를 잔뜩 물어볼 생각이다.
손주며느리이니까 많이 얘기해주시겠지?
외할아버지가 아마도 나이가 90가까이 되시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후
별로 말씀이 없으시단다. 아마도 귀가 잘 안들려서 그런걸지도.

암튼 가능한 손짓발짓하면서(할아버지의 영어는 잘 안들린다, 발음이 좀 다르다, 시어머니 발음은 정말 교과서 발음인데 왜그럴까) 할아버지의 히스토리를 물어봐야겠다.
실례가 되지않는 한도에서 ㅎㅎㅎ

예전에 한번 할아버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소년병으로 2차세계대전에서 화물선에서 근무한적이 있었다고 들은것 같다.
그 얘기부터 다시 물어봐야지!

아, 그래서 나의 패시브인컴은 아직 진행중이다.
구글이 애드센스를 왜인지 달아주지 않는다.
몇달전에 신청했는데도 트래픽이 없어서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
트래픽만 생기면 너에게서 광고수입을 받아내겠다. 1센트라도 ㅋㅋㅋ





생각해보니 내가 한국말의 즐거움을 너무 잊고 살았었다.
예전엔 싸이월드에다가 소소하게 글도 자주 올리고 그랬는데.

김봉봉과 고네씨



내 자서전을 쓴다면 봉봉이와 네씨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참고로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봉봉이는 우리집 강아지(2012년생 추정)
네씨는 우리집 고양이(2015년생 추정)이다.

이름은 쉘터에서 지어진 그대로의 이름을 따와서,
봉봉이에게는 마크라는 멋진 이름이 있는데,
나는 주로 김봉봉이라고 부른다.

신봉봉이 아니라 김봉봉이어야만 할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남편의 풀네임은 마일스 리차드 콜만인데,
친구들끼리 농담삼아 마서방이라고 불렀으며
또는 분당 고씨로 귀화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등의 우스개소리가 있은후로
나는 가끔 네씨를 고네씨라고 부르곤 했다.

마일스는 사실 고양이를 싫어했다.
근데 내가 자꾸 쫄랐다.
고양이한테 알러지가 있단다.
흠.

그래서 우리는 쉘터를 자주 방문하였다.
귀여운 고양이도 볼겸 귀여운 강아지도 볼겸 
그리고 사실은 마일스가 정말 고양이알러지가 있는지가 궁금하였다.

우리가 봉봉이를 입양한 곳은 산마테오 벌링게임에 있는 휴먼소사이어티였다.
강아지가 너무너무 갖고싶어서
정말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계속 마일스를 졸라 댔다.

마일스는 처음에는 생각해보겠다고 하더니
이후에 니가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고 하더라.
역시 우리 남편님(이럴때만 ㅋㅋㅋ).

그래서 쉘터를 세네번 반복해서 간 후에
우연히도 나의 생일날(2013년 11월 13일) 봉봉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른 강아지들은 너무 컸거나
안 예뻤거나(미안)
색깔이 까맣거나(미안, 엄마가 검은개는 별로란다)
암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한국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말티즈 종류를 기르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쉘터를 적어도 세네번 방문하여 여러번 강아지를 보고있었다.
그냥 강아지들을 보고있는 것 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는데,
그 아이들은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아니 행복해보이는 애들도 있었고 아닌 애들도 있었던것 같다.

암튼 강아지들은 대부분 (여기서 내가 강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정말 퍼피 인것은 아니다. 성견도 강아지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에 시적허용이랄까 하하하)
자고 있거나
아니면 짖고 있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거나
똥을 싸거나
오줌을 싸고 있었다.

난감하였다.
어떤 강아지는 너무 프렌들리해서
나의 에너지레벨이 감당할수가 없을 것 같았고
어떤 강아지는 너무 안이뻐서(미안)
내가 잘 키울수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외모지상주의자구나.

암튼, 그러던 어느날, 내 생일날,
마일스가 회사에 휴가를 내고 나와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주었다. 아싸.

나는 사실 매우 우울한 상태였다.
어쩌다 운이 좋게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하여
처음 육개월은 어학연수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고 신이 잔뜩 나 있었는데
9월달에 영주권이 나와버렸다.
즉 그말은,,,,,나도 취직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남들에게는 꿈과 같은 영주권이
왜 나에게는 짐과 같이 느껴졌을까.
사실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됐는데 갑자기 나에게 취업비자를 주는 미국정부가 이상하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ㅋㅋㅋ
어쨌든 나도 취업을 할수있구나 라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ㅅㅂ(욕주의), 하지만 행정학을 다시 하기는 너무 싫었다.
박사과정동안 난 정말 나의 0.00001%의 에너지까지
내 논문에 쏟아부었었고
아 정말 그때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사실 지금도 쳐다보지 않는다. 내 논문과 퍼블리시된 저널은
저널에만 수록되어 나의 책장에 진열되어있을뿐이지,
나는 엄마아빠한테 내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저널에 실렸다는 얘기를 한번정도 한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불안했었나보다.
다시 공부하기가 너무 싫었으니깐.

암튼 그래서 너무 우울해서 나에게도 강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는 취업전이고 내가 과연 미국에서 그것도 사기업에 취업을 할 수 있을까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었고(실제로 이력서를 시월부터 내기 시작하였으나 아무도 응답이 없었다) 너무 절망적이었다.

누구는 고작 2-3달 해보고 왜그러냐고 그랬지만
나는 그게 너무 절박했다.
박사까지 해놓고 전업주부가 될까봐
너무 불안했다.

암튼 이런저런 연유로 나는 강아지를 입양하게 되었다.
나중에 작은언니 말로는 내가 어렸을때부터
강아지를 너무너무 가지고 싶어했단다.
그랬었나? 싶은데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내 친구중에 푸들 두마리와 말티즈 한마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것 같은데.
그아이가 내 떡진머리를 보고 기름공장이라고 놀려서
좀 속상했었지만, 굉장히 유쾌하고 즐거운 아이었다.
(사실 이 아이가 변태1을 본 그 장본인이다. 커밍아웃 미안 친구, 니가 혹 이 글을 볼일은 없겠지만 혹시 불편하다면 말해줘. 글 내릴께)

이름과 성도 기억이 나는데, 사실 100프로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익명인 그 친구의 집에서 어느날 엄마푸들이 아기 강아지들을 대여섯마리나 낳았고, 나는 출산의 순간에는 같이 하지 못했지만, 친구로부터 그 이야기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었던 것 같다.
또한 꼬물꼬물 꼬물이들이 대여섯마리 엄마젖을 빨고
엎어치기 배치기를 하고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 우리집에도 강아지가 있었으면 좋을텐데.

아마도 강아지가 집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은 꽤 어렸을때 부터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도 개를 싫어한다고 하고
아빠는 공동주택인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는 것은 규칙위반이라며 안된다고 하였다.
우리아빠는 아마 그때 동대표같은 이상한 직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암튼 그래서 나의 삼일천하는…이 아니고
나의 강아지 쪼름 사건은 쉽게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작은언니가 나에게 말을 할때까지 나는 내가 어렸을때 강아지를 가지고 싶어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하지만 내 욕망은, 내 욕구는, 거기 그대로 있었나보다.
그냥 참고 있었던거지.
우리 착한 마일스와 결혼할때까지 ㅋㅋㅋ
마일스 너무 고마워.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안되지. 왜냐하면 나에게는 마일스가 싫어하는 고양이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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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나빼고 다 고양이가 있을 것 같은 그런 나날들이 지속되었다.
아마도 도율이가 고양이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다는 얘기에서 나의 고양이를 향한 뽐뿌질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도율이는 나와 엄청 친하게 지낸 고등학교때 친구이다.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을 통틀어 같은 문과반이었고, 단짝처럼 지냈다.
요새는 많이 연락을 못하지만(내가 유학을 가게 된 후로 잘 연락을 못하게 되었다. 미안 도율) 트위터에 그아이가 고양이식빵사진을 올릴때마다 박장대소하며 보곤 하였다.
한편, 도율의 아버지는 금연자였다. 담배를 폈다가 끊었댄다. 
나는 담배를 끊는 사람하고는 친구를 하면 안된다는 명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혹 도율의 아버지가 매정한 사람이 아닐까 걱정을 하였다.
하지만 도율의 아버지가 처음과는 달리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더랜다.
그리고 도율이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 같았다.

흠.....금연자를 현혹할만한 고양이, 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냐
너무 궁금하였다.

너무 궁금하였다.

너무 궁금하였다.

트윗질을 하고, 오유의 동게를 가고, 네이버에서 고양이 사진을 찾아보고 있었다……

나는 어느 순간 아 나는 고양이가 필요해 라고 생각하였다.
이유는 여러가지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우선 봉봉이가 너무 외로워한다.
그때 나는 첫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마일스도 아침일찍 회사를 가서 저녁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봉봉이와 놀아줄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예측미스였다.
봉봉이와 하루종일 같이 있을줄 알았는데
봉봉이를 데리고오자마자 인터뷰가 마구마구 잡히더니
직장이 생겨버렸다.
역시 우리 봉봉이는 복덩이였어.

암튼 그런데 문제는 봉봉이의 배변문제였다.
이 아이는 고집이 진짜 쎄서 실내에다가 쉬를 안한다.
그리고 응가도 안한다.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마일스는 '왜 니가 미쳐' 하는데
나는 쉬를 참는것도 응가를 참는것도 공감이 되어서 견딜수가 없었다.
(참고로 나는 장이 약해서 한때는 서울시지하쳘역 화장실의 위치를 거의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약간 과장 포함해서)
게다가 쉬를 자주 참는 강아지는 이후에 늙어서
방광염등에 걸릴수 있다고 한다.
우리집 강아지는 당시 한두살 이었지만
그래도 세살버릇이 여든간다고
아이의 배변버릇을 고쳐보고 싶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심지어 봉봉이의 원망섞인 얼굴과
분노에 찬 복수를 경험하였다 ㅋㅋㅋ
(배변유도 스프레이, 배변유도 꼬깔콘, 배변유도 피패드, 배변유도 가짜 잔디 안해본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강아지를 넓은 케이지안에 두고, 문을 잠궈놓고, 그 옆에다가 배변판을 놓으면 강아지가 어쩔수없이 쉬를 하게되고, 그때 폭풍칭찬을 하면 된다는 블로그를 읽었다)

그런데 말이다, 봉봉이는 거의 만 24시간을 참았던 것 같다.
이것은 니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의 결투였다.
나는 봉봉이가 쉬를 해야하는데 해야하는데 하면서 초를 재고 있었다.
하지만 봉봉이는 갖혀있는 케이지에서(케이지가 너무 작았던 것 같다) 자꾸 울기만 했고,
나는 더이상 그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우리 김봉봉씨는 나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한번 주더니
우리집에서 가장 비쌌던 흰색가죽소파 모서리에다가 다리를 척 올리더니 자랑스럽게 쉬를 하는 것이다.

아.
나는 졌다.
그래.
너는 니가 쉬하고 싶을때 하거라.
나는 치울테니.
니가 쉬를 하든 말든
이제 신경을 안 쓸것이다.
이 고약한 놈.

아 이야기가 또 산으로 빠졌다.

그리하여 봉봉이는 쉬를 참으면서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혼자 집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너무 미안해서,
꼭 강아지 형제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너무너무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체력도 딸리고, 이미 봉봉이 산책을 시키는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봉봉이 산책때문에 마일스와 많이 싸운듯 하다.
나는 어서 봉봉이를 산책시키라고 종용하였고
마일스는 지금 말고 나중에 하겠다고 했다.
나는 지금 당장 하라고 했고
마일스는 그럴거면 니가 하라고 했다.
맞는 소리다.
내가 데려온 내 강아지인데 왜 나는 이리도 귀찮아했을까.

암튼 세월은 흘러 마일스가 고양이를 입양하는데 동의를 하였다.
수개월간의 쪼름과
협박과 논리와 애교로 얻어낸 성과였다.

사실 마일스는 고양이 알러지가 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양이가 많은 쉘터나 고양이가 많은 집에 가면 알러지 약을 먹어야 했지만
그냥 한마리만 있거나 단모종의 경우에는 알러지가 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때는 이때다.
고양이를 데리고 와야징 ㅋㅋㅋ

실제로 우리네씨는 첫눈에 내 눈을 사로잡았다.
삼개월된 아기 고양이
회색과 흰색털
유리창 넘어로 나에게 몸을 부비고 있었다.
아 너구나.

우리는 짧은 상담시간을 거친후
그리고 30분정도 고양이와 놀아본후
고양이 입양을 결정하였다.
마일스도 흔쾌히 내 결정을 따라주었다.
공교롭게도 그때도 내 생일이었다. 2015년 11월 13일

아마도 내가 생일선물로 달라고 졸랐던 것 같다.

사실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면서의 에피소드는
이루 말할수가 없다.
한번은 봉봉이를 잃어버려서 24시간만에 되찾은 경우도 있었고
고양이가 집을 나가서 안 오는 바람에 몇시간을 마음을 졸인적도 있었다.
(이썰은 나중에 풀겠다)

지금 나는 마당이 있는 타운홈에 살고 있는데
우리 고양이는 외출냥이 되었고
우리 강아지는 여전히 마당에다가 쉬를 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마당에 쉬를 할수있게 할까 많은 고민을 하였으나
최근에는 정말 급하면 세탁기앞 배변시트 늘 고정된 자리에 응가와 쉬를 하고 있다.
고마워 김봉봉. 그리고 고네씨.
너희때문에 내가 많이 좋아졌어.




우울증환자가 싫어하는 말

마음 먹기에 달렸다.
운동을 하거라.
몸을 움직여라.
너무 생각이 많다.
별 생각을 다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 는 내가 좋아하는 말 ㅋㅋㅋ

버트란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보시오.
거기에 진리가 다 들어있소.
우리 아빠는 1944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당시 스물다섯 할머니는 당시 스물셋 아마도.
둘은 중매로 결혼을 하고 고향인 충청도 면천?을 떠나 할아버지의 직장이 있던 신의주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있었던 같다

그러다가 45 8 일본이 패전을 하고
북한지역으로 소련군들이 주둔하면서
할아버지가 다니던 은행이 폐쇄되었다
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살이 우리 아빠를 데리고 고향으로 향하였는데
그때 버스가 있었나 기차가 있었나 자세한건 다시 할머니한테 물어봐야겠다
암튼 도중에 소련군과 조우하여 소련군이 아기인 우리아빠가 귀엽다며 할머니한테서 아기를 뺏어 우쭈쭈 하며 데리고 모양인데, 할머니는 완전 깝놀라서 어서 달라고 애원해서 금새 돌려받았다고 한다

여차저차하여 38선이북까지 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미 남북한이 38선으로 갈라져있어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였고 38선을 넘다 걸리면 죽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빠는 근처에 숙박을 하면서 믿을 만한 뱃사공을 수소문하였고(당시에 뱃사공이 돈만 받고 밀고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 한달후 믿을만한 뱃사공을 구하여 남하에 성공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당시 서울에 살고 계셨던 본인의 큰형님의 집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큰형님과 큰형수님은 우리 할아버지와 수개월간 연락이 닿지 않아 그만 운명을 달리한줄 알았다고. 그래서 꾀죄죄한 몰골로 세식구가 큰집대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오열하였다고 한다





죠앤 할머니

죠앤 할머니는 2018 현재 88살로 아마도 1930년생인가보다
미국 오레곤 출신인 그녀는 
하와이에서 오레곤으로 유학을
하와이 출신의 남자와 결혼하여
1952 하와이에 처음 왔다고 한다

당시 하와이는 아직 미국의 () 되기 전이었고,
여전히 백인들은 haole(외지인)라고 불리던 시절이었단다
와이키키에는 로열 하와이안/쉐라톤/모아나 호텔등 네개의 호텔밖에 없었고 외에는 작은 집들이 즐비하였다

남편은 사탕수수농장의 매니저로 일하였는데
중국인 노동자들은 일찍 농장을 떠나
땅을 가진 하와이안 여자들과 결혼하여
상점을 차렸고
일본인들은 농장에서 오랫동안 일하였고
한국인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죠앤 할머니의 남편의 증조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당시 기근이 심해 영국정부? 많은 사람들을 외국으로 이주시켰는데 그중의 한명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어떤 섬에 도착해서는 인육을 먹는 원주민과 조우하기도 하였다고
우여곡절끝에 마우이섬 라하이나에 도착하여 목수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주문이 하와이 부족장 집안의 요람을 만드는 일이었다고. 그리고 요람을 쓰던 아기와 후에 결혼하여 정착하게 모양이다

암튼 죠앤 할머니는 현재 다이아몬드 헤드 근처에서 비앤비를 운영중이고 딸인 브룩이 어머니를 돕고있다.

 브룩에게는 이제 열살된 늦둥이 딸이 한명 있는데 나에게 불에 화석이 이파리와 나무숯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최근에 옆집에서 불이 나서 전소하였는데 다행히 할머니가 재빨리 911 신고하는 바람에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을수 있었다고 한다)

그 아이는 네이티브 인디언, 코캐이시언, 하와이 네이티브, 블랙 등의 인종이 섞인 아이였는데, 학교에서 자기의 기원에 대해서 발표하라고 해서 네이티브 인디언을 골랐다고 한다. 매우 귀여운 아이였다.









포털사이트

포털사이트

친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할아버지랑 텔레비전을 보다가 
포털사이트가 뭐니?
라며 나에게 준비된 질문을 하셨던 때이다
돌아가시기 몇개월전이었을까? 언니 결혼식 때만큼은 아니였으니까 훨씬 건강하셨었다
나는 몰랐다. 포털사이트가 뭔지를
그래서 모르겠어요 라고 대답하였다
그뒤로 포털사이트라는 단어를 자주 들었고
사전에도 찾아봤는데 모르겠어서
결국 할아버지에게 대답을 드리지 못했다


지금은 대답해드릴수 있다

2018년 8월 29일 수요일

유희열 자서전과 같은 거를 써보고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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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로파일링 중

나는 프로파일링
부제:두명의 노출증환자와 한명의 유괴미수범

생각해보니 성범죄에 노출된 적이 세번이나 있다
그것도 전부 청소년시기에.

첫번은 중학교1학년즈음
무슨 연유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친구와 수내역에서 양지마을 쪽으로 걸어가는 중이었고 한창 공사가 진행중인 수내역 1번출구 부근에서
어떤 젊은 남자가 자동차가 우리에게 접근해 길을 물어보았다. 분당구청을 찾고 있길래 나는 여기서 직진해서 왼쪽으로 꺾으시면 되요 라고 길을 가르쳐주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가 길을 가르쳐주다 말고 차에서 멀리 떨어져 먼저 가버리는 것이다
나는 길을 가르쳐준후 성급히 친구를 쫓아가며 먼저가 라고 물었고 친구는 아저씨 바지를 입지 않고 있었다고 놀란 얼굴로 대답하였다
나는 얼굴만 보면서 대화를 하느라고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서른전후에 생머리인 멀쩡하게 생긴 남자였었다. 동글동글하게 생겼었고 약간은 이지적은 느낌도 있었던듯. 머리는 생머리이나 약간 굵은 파마머리를 했었던것 같기도 하다. 약간 이승환 (승환님 죄송) 승용차는 르망 같은 차였던 같다. 색깔은 빨간색 아님 흰색(사실 기억안남: 혹시 최면술을 받으면 기억이 날지도? - 그알 너무 많이 )



두번째는 고등학교 들어가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우리집에서 걸어서 15-20 정도 떨어져 있었고 집과 학교 사이에는 분당중앙공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아침일찍 학교에 가느라고 기분이 별로였는데 신호등 단지숲길에 하반신을 노출한 오십전후 정도 되는 아저씨가 멍한 눈으로 서있었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잽싸게 자리를 피했는데 이미지가 매우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후로 단지숲길을 지날때마나 겁이나 심장이 두근거렸는데 다행히 그뒤로 한번도 출몰하지 않았다
이후 루브르 박물관에서 데이빗 상을 보고 내가 것이 이런 거였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지금도 마당에 심은 할라피뇨가 자랄때마다 난감한 느낌이 든다
변태아저씨 인상착의: 약간 대머리, 런닝 티셔츠(!), 바지없음, 털많은 다리, 피부는 하얀편, 안경미착용, 운동화에 테니스양말(아마도)
출몰지역: 양지 금호 105 104 사이 횡단보도가 보이는 숲길. 계단위
아이씨 경찰에 신고할걸!!!! 너무 당황해서 신고할 생각도 못하고 아마 친구들이나 엄마한테는 얘기했을려나??? 만약에 얘기 안했다면 나는 이런 성범죄는 범죄가 아니다라고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거고, 만약 얘기했더라면 엄마!!! 신고하자고 안했어????
아마도 엄마도 이런 성범죄는 범죄가 아니라고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군 ㅋㅋㅋ 모전녀전



세번째일은 두번째 일이 있고나서 몇달정도 지났거나 아니면 해가 바꼈던 같다
그날도 어김없이 이른 아침에 기분이 나쁜채로 등교를 하고 있었다. 중앙공원 옆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어떤 승용차가 옆에 바짝 붙더니 아저씨가 학교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학교가 멀었으면 차를 얻어탔을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학교는 십분거리에 있었고 나는 이사람은 모지? 나한테 호의를 배풀지? 이상한 놈일세 라고 생각하여 아니요 필요없어요 그냥 걸어가면 돼요 라고 대답하고 다시 걷기시작했다. 아저씨는 차를 몰면서 일이분정도 나를 쫓아오면서
자기가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조카가 있는데 아침에 힘들어하는 같아서 차에 태어다 주려고 한단다. 나는 약간 솔깃? 했는데 말고도 앞에 등교하고 있는 아이들이 멀리 있었고, 나는 굳이 모르는 사람한테 차를 태워주려고 하지? 하면서 의아해했는데, 무엇보다도 아마도 잠이 덜깬 상태에 자꾸 말을 시키니까 엄청 짜증이 났던것 같다(아침 짜증이 이럴 좋습니다 학부모님들). 그래서 무시하고 걸어갔다
다행히 등교중인 다른 학생들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오싹한 경험이다. 남자가 바지를 입고 있었는지 확인할 생각도 못했지만 그놈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출몰지역: 분당구청맞은편 중앙공원 도보, 아마도 중앙공원입구 가기
: 흰색? 세단?
용의자 인상착의: 얘도 이승환같은 느낌이었네(미안 승환님! 내가 착각하는 걸수도) 마른 체형, 폴로셔츠?, 바지는 입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노출범이냐 납치미수범이냐